- 채현국·이낙훈과 함께 서울대 연극반 재건 -
▶몇 년 전에 도발적 인터뷰로 ‘우리 시대의 진짜 어른’으로 떠오른 채현국 선생님을 저희 <다들>이 인터뷰를 했습니다. 선생님과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동기라고 하시던데요? 함께 서울대 연극반을 재건했다는 말씀도 하시구요.
아, <다들>에서 채현국이 인터뷰한 건 내가 읽었어요. 채현국이는 나랑 자꾸 동기라 그러는데, 사실 나보다 한 살 어립니다.(웃음) 3학년 때 연극반을 재건했는데, 원래 있던 연극반을 대학본부에서 해산시켜버렸던 모양이에요. 예산 남용이라는데, 남용이 아니라 예산 정리를 잘못한 거야. 결산할 때 급해서 계란을 150개나 먹었다고 처리하는 바람에….(웃음) 그걸 알아보고 다시는 그런 일 없게 하겠다며 내가 대학본부 가서 각서를 쓰고 연극반을 재건했지요. 문리대뿐만 아니라 사범대, 미대, 치대 등에서 연극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다 함께 했어요. 권오일, 이낙훈 등이 주축이었는데, 그 중에 현국이도 있었지.
- 정치는 ‘행세’ 하는 게 아니라 ‘서비스’ 하는 것 -
▶많은 분들이 ‘이순재’를 배우로 알고 있지만, 한때 정치를 하기도 했지요?
제가 14대 국회의원을 했습니다. 20여 년 전이지요. 13대 때 첫 출마를 해서 700여 표 차로 낙선한 데 이어 14대 때 당선됐으니 8년 동안 국회를 들락날락하면서 지역구 일을 한 셈입니다.
▶어떻게 정치판에 발을 들이게 됐습니까?
11대 때 탤런트 이낙훈이가 문화계 대표로 비례대표가 됐어요. 이낙훈이하고는 친구 사이라 국회 들어가면 열심히 뒤를 밀어주겠다고 했더니, 기왕 하는 거 같이 들어가자 하더라구. 문화예술 정책을 개발하고 국회에서 관련 법을 발의하면 성과가 있지 않겠느냐 싶어 같이 들어간 겁니다. 그런데 별 성과가 없었지요. 12대까지 중선거구였던 국회의원 선거 제도가 13대에서 소선거구가 됐어요. 그랬더니 중앙당에서 어디 나가고 싶은 데가 없냐고 물어보는 거야. 나는 이북 사람(함경북도 회령 출생)이라 특별한 연고도 없었지. 그러자 달동네인 중랑갑에 내 이름을 턱하니 올렸더라구요. 후보 공천이 되고 살펴보니까 개천 복개공사며 도로 닦는 거며 전부 중랑갑 지역인 면목동 앞에서 끊어지는 거야. 이 동네는 버리는 동네다 싶었지요. 그래서 더더욱 주민들을 열심히 만나면서 더욱 열심히 이야기를 듣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첫 선거에서 낙선하셨지요?
그렇지요. 13대 때 정확하게 759표 차이로 떨어졌습니다. 1천표 차이만 났어도 손 털고 나왔을 텐데, 700여 표 차이니까 아깝더라구. 그래서 다음 14대 총선에도 나갔고, 3800표 차이로 압승했지요. 그땐 내가 <사랑이 뭐길래>에서 대발이 아빠 역을 하던 때였거든. 얼굴이 팔린 사람이니까 후진적 정치를 할 수 없었고, 선거도 아주 모범적으로 치뤘지요.
▶지금도 중랑구에 가면 주민들이 그렇게 반가워한다면서요?
그러문요. 선거는 고개 뻣뻣이 들고 다녀서 되는 게 아닙니다. 지역민이 “우리 식구다” 하는 친밀감을 느껴야 당선되는 것이지요. 내가 정치를 하면서 딱 하나 배운 게 겸손입니다. 정치는 ‘행세’하는 게 아니라 ‘서비스’라고, 지금도 누누이 말하고 다녀요. 만약 비례대표로 시작했다면 편하게 정치를 했을 텐데 지역구를 주는 바람에 철저하게 겸손에 대해 배울 수 있었지요. 재래시장에 가면 생선 파는 아주머니들과 악수를 하는데, 손 내미는 것만 봐도 내 편인지 아닌지 알 수 있어요. 내 편은 고무장갑을 벗고 손을 내밉니다. 아닌 편은 생선 썰던 고무장갑 낀 채로 손을 내밀지요(웃음). 그래도 그렇게 다니며 악수하면서 친해지면, 표는 안 찍어도 욕은 안합니다. 선거가 끝나면 밥 먹으러 오라고 초대도 하구요.
▶1996년에 국회의원 끝내고 나온 뒤에도 5년간 그 지역에서 문화원장을 하셨지요?
예, 문화원장하고 나서도 6년간 사회복지협회장을 했는데, 다 이렇게 바탕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 11년을 한 셈인데, 업무추진비 한 푼 안 쓰고 내 돈 쓰면서 봉사하는 정신으로 왔다 갔다 하며 서비스 한 겁니다.
- 젊은 정치인들, 세련미로 구태 끊어내라 -
▶참으로 모범적으로 정치를 한 셈인데, 요즘 젊은 정치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많으시겠습니다.
할 말이야 많지요. 사실 요즘의 정치 행태는 옛날부터 내려오던 구태를 그대로 반복하는 거예요. 지금은 이념의 갈등, 영호남의 갈등이 없는 시대잖아요? 유전적으로 내려오는 악습의 잔재가 아직 남아있는데, 어느 시점에서 끊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의 역량을 하나로 능동적으로 결집시켜야 해요. 선배들은 사분오열 때문에 망했는데, 그건 오랜 역사를 통해 경험적으로 배운 피해의식에서 오는 생존을 위한 교훈이었단 말이에요. 여기 붙고 저기 붙는 건 살기 위해서였단 말이지요. 사실 그것도 국가 리더들이 극복할 수 있었는데, DJ와 YS가 갈라서면서 극복할 기회를 놓친 겁니다. 이제는 그런 이념의 갈등이 아니라 잘 먹고 잘 사는 것, 다들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가는데, 다만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에요.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가 아니라 누가 더 잘하냐의 경쟁이 되어야지요. 세련미를 가지고 구태를 날카롭게 끊어내야 합니다. 젊은 정치인들이.
- 철학과 4년? 어려운 책 읽어내는 인내심을 기른 기간 -
▶이제 본업 얘기를 좀 나누시지요. 배우로서 선생님의 개인사를 여쭙고 싶습니다. 학벌 얘기라서 말씀 드리긴 뭣하지만, 서울대 나와서 배우 하는 게 지금도 일반적인 일은 아니거든요. 가족들 반대가 심하지 않았나요?
반대요? 말도 못했습니다. 그때는 배우라 그러면 90%가 반대하는 직종이었지요. 제가 서울고를 다니다 한국전쟁 때 피난 가서 대전고에 다녔는데, 서울대 정치학과에 시험을 쳐서 첫 해에는 떨어졌어요. 그때도 정치학과는 워낙 점수가 높은 과여서 한 해 재수한 뒤에는 철학과에 원서를 냈습니다. 턱걸이로 붙었는데, 철학과에 들어가 보니 칸트 철학의 대가 고형곤, 헤겔 변증법 강의로 유명한 박종홍 등 유명한 교수님이 줄줄이 계셨어요. 박종홍 교수님은 헤겔 변증법 강의를 8년간 하셨는데, 철학과 학생들뿐 아니라 다른 학교 철학과 강사, 선생들이 청강을 하러 들어와서 언제나 좌석이 꽉꽉 찼어요. 이 분들 체취만 4년 맡고 나가도 많은 보람이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고형곤 교수님이 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4년 공부했다고 철학을 알아? 아니야, 이제 겨우 어려운 책을 읽을 수 있는 인내심을 기른 거야.” 사실 그 분들 덕에 인내심을 배워 배우를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당시 배우는 밥벌이도 어려운 직업 아니었나요?
그렇습니다. 배우해서는 도저히 생활이 안 됐지요. 처음에 연극을 10여 년 할 동안은 돈을 한 푼도 못 벌었어요. 그래서 먹고 살려고 TV 쪽으로 갔지요. TBC 창립하자마자 창립 멤버, 지금으로치면 전속 탤런트로 갔는데, 월급을 2만원 주더라구. 한 달 2만원 주면서 31편을 시켜먹더라구.(웃음) 그래도 그 정도면 생활의 기반이 되었어요. 그러다가 1967년쯤에 출연료 체제로 전환됐고, 1980년 언론 통폐합할 때까지 TBC에서 전속으로 17년 동안 일했습니다. 그런데 TV에 나오니까 영화계에서 부르기 시작하는 거야. 원래 난 대학 시절부터 외국 영화들 엄청 보면서 연기를 꿈꿔왔는데, 살다보니까 영화가 가장 나중에 나를 부른 겁니다. 사실 영화는 기다림의 예술인데, TV는 시간에 맞춰 찍어야 되거든. 우리가 영화판으로 가서 한없이 기다리는 풍토를 뒤집어 놓았지.(웃음)
- 연기, 하고 싶어 한 일, 후회는 없다 -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배우 된 거, 후회 안 하십니까?
나는 애초에 재능이 있거나 출세를 하려고 연기를 한 게 아닙니다. 어차피 내가 좋아서 한 거지. 어릴 때부터 나한테는 돈 버는 재주가 없다는 걸 직감했거든. 그래서 동생한테 부모님은 네가 모셔라 하고는 동생에게 상과대학에 가라고 하기도 하구요. 뭐 결국은 내가 부모님을 모시긴 했지만(웃음) 그저 하고 싶어서 했던 일이기 때문에 남들처럼 2~3모작 안한 거 후회 안 해요.
▶‘배우’는 ‘배우는 사람’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연기하면서 많이 배우셨나요?
그럼요. 예술가나 배우는 항상 새로운 대상을 찾고, 새로운 창조를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막장 드라마의 비슷한 역할이라도 다른 인물이기 때문에 다르게 표현하고 싶지요. 그게 배우의 보람이고 자부심입니다. 예전에 어떤 연출이 내시 역할 하는 배우에게 만날 내시만 시키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 사람에게 다른 역할을 줘봐라. 타성에 젖지 않고 자극을 받아 다르게 연기할 것이다, 그랬더니, 실제로 다른 연기가 나오는 거예요.
완성이나 종결이 없는 게 예술이고 연기예요. 시대에 따라 최고의 작가, 최고의 배우가 있을 뿐이지, 그게 완성은 아니라구요. <햄릿> 같은 경우도, 최고의 햄릿이 있는 게 아니라 로렌스 올리비에의 햄릿, 랄프 리처드슨의 햄릿, 존 길구드의 햄릿이 있을 뿐이고. 잠시 뒤 막이 오르는 연극 <사랑해요, 당신>에서도 나와 주인공으로 더블 캐스팅된 신구의 표현하고 내 표현이 달라요. 그런 게 우리 직종의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연기에 천재는 없어, 배우는 노력해서 먹고 살아야 -
▶60년 넘게 연기를 하면서 많은 분들과 작업을 하셨을텐데요, 어떤 배우나 감독하고 특별히 친하고 맞은 배우셨는지요?
배우 중에는 최무룡 선배와 가까워요. 최 선배는 용모든, 음색이든, 암기력이든, 배우를 하기 위한 천혜의 조건을 타고 난 분입니다. 우리 연배들 중 유일하게 TV에 적응한 인물이기도 해요. 당시 다들 감성 연기를 할 때, 최무룡이 혼자 신식 연기, 즉 메소드 연기를 했지요. 덕분에 TV에서도 먹힐 수 있었고. 아버지로서는 빵점이지만, 배우로서는 높이 쳐주지 않을 도리가 없어요.
신구하고도 친한데, 신구의 경우는 타고났다기보다 노력파구요. 이 직업에 천재라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천재란 아역 때나 가능한 거죠. 다들 노력해서 먹고 삽니다.
후배들 중에는 여자로는 김창숙, 장미희, 유지인이 있고, 남자들은 이덕화, 김영철, 한진희 등이랑 친했어요. 장미희는 명지전문대 교수인데 저는 그 애 볼 때마다 “넌 정말 대단한 아이다”라고 이야기해줍니다. 의지와 집념이 대단해요.
감독들 중에는 유현목 감독과 <막차로 온 손님>을 비롯해 여러 편 하면서 의기투합했습니다. 제 친구이기도 한 고영남이 있구요. 이만희 감독과는 <기적> 한 편을 함께 했습니다. 기차 안에서 벌어진 일을 그린 작품인데 최무룡, 남정임과 함께 했지요. 그거 딱 한 작품하고 인연이 안 돼서 못했습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해랑 선생님이 나한테 제일 많은 영향을 줬어요. 연극 배우들한테는 하늘 같은 분인데, 제가 대학 다닐 때 모셔 와서 연극 연출을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해주셨어요. 졸업하고 신협의 단역으로 몇 번 뵙고…. <밤으로의 긴 여로>는 정말 좋았지요.
▶배우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한 마디.
요즘은 연극영화과나 방송연예과 같은 데서 일 년에 1천명 이상 배출되는 시대입니다. 우리 때보다 조건은 향상되었지만, 방송국들이 기수 모집도 하지 않는 시대이기도 하구요. 보장이 없는 직종이니,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야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요. 장동건이나 이영애처럼 타고나지 못했다면, 송강호나 최민식의 길이 있습니다. 연극계에서 일하던 배우들이 TV 조연으로 왔다가 기회를 잡고서 치고 올라가는 거지요. 요즘은 TV 조연을 해도 생계유지가 되니까요. 그러나 평소에 열심히 자기 계발해서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잡아야 됩니다. 연기란 게 처음엔 막노동과 마찬가지에요. 의지가 있으면 밑바닥부터 심부름하고 열심히 하면서 역량을 키워야 하고, 그랬을 때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의지가 없고, 요행수를 바라면 절대 안 되고요. 다행히도 건강만 유지하면 나처럼 70살, 80살까지 일할 수 있으니 괜찮은 직업이긴 합니다.(웃음)
- 외국인에게 한국어 가르치는 원격평생교육원장 -
▶평생교육 쪽 경력도 있으시더라구요. 한국어교사 원격평생교육원 원장이시지요?
인터넷을 통한 외국인 대상의 한국어교육원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외국인들이 한국말을 배운다는 거, 더 나아가서 교사 자격증을 줘서 자국에 돌아가 한국어 교사가 된다는 건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5~6년째 도와주고 있습니다.
우리말을 배우려면 올바른 표준어를 가르쳐줘야 되거든요. 우리가 영어를 배울 때 영어 발음에 신경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근데 우리말이 어려워요. 동음이의어가 많아서 발음으로 구분해야 되는데, 요즘은 말, 그러니까 화법을 지적하는 연출자가 없어요. 연출자 자신도 모르니까. 예전에는 배우들이 사전 펴놓고, 단음, 중음, 장음을 구분하며 연기했습니다. 나는 요즘 우리 아이들(SG연기학원 수강생)에게 발음 공부부터 시켜요. 대학 4학년들 워크숍이 있는데, 두 달 동안 주말도 빠짐없이 매일 나와서 연습합니다. 잘 하는 애들 주인공 시키는 게 아니라 제비뽑기해서 주인공을 시키지요. 기회균등의 차원에서. 그 워크숍에서도 1개월간 언어 연습을 시킵니다.
배우는 말로 시작하는 직업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 표준어를 구사하는 게 기본이지요. 아나운서와 똑같지요. 배우가 하는 말은 어떤 조건의 사람들도 다 알아들어야 합니다. 지역, 연령, 학력 상관없이 다 알아들어야 해요. 이게 원칙입니다. 두루뭉술하게 발음해도 되는 TV 드라마도 있지만, 좀 더 심오하고 깊은 연극은 언어적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의미 전달이 안 됩니다. 연극의 문학성, 작품성은 다 언어로 전달되는 것이에요.
이외에도 사회교육원 등에서 교수하는 친구들이 있어 간혹 강의 의뢰가 들어오는데, 타 직종에는 제가 해줄 말이 없어요. 피할 수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가서 횡설수설하고 돌아오는데, 우리 직종에는 가서 해줄 얘기가 많이 있어요. 타 직종은 내 전문이 아니니까 공염불 같은 소리만 하고 오죠.
▶마지막 질문입니다. 62년 동안 수천 가지의 역할을 하셨는데, 아직도 하고 싶은 역할이 있습니까?
오히려 젊었을 때 하고 싶었던 역할을 많이 놓쳤어요. 난 <햄릿>도 못해봤으니까. 왜 그런가 하면 공연 시작을 노역부터 했어요. 대학교 3학년 때 <지평선 너머>라는 연극이 첫 연극이었는데, 육십 먹은 선장 역으로 데뷔했어요. 근데 영화나 TV에서는 좋은 역할을 많이 했구요. 허준도 하고, 영조도 하고. 연극에선 타이밍을 놓친 거예요. 셰익스피어 연극 중에는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패트릭 하나 해봤네요. 최불암이도 한 <햄릿>을 나는 못 해봤네.(웃음) 연기라는 게 그래요, 평생 기다린다고 차례가 오진 않아. 로렌스 올리비에처럼 자기가 제작하고 연기하면 되는데, 그럴 여력이 안 되니까. 맡겨주는 거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지요.
“배워서 남주냐!”
